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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찬의 ‘시, 몽상과 묵상’ : 서른에서 마흔까지 - 인생은 오래 지속된다

Richchi 2017. 5. 27. 21:32


정재찬의 ‘시, 몽상과 묵상’

서른에서 마흔까지

인생은 오래 지속된다





서른 즈음에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서른 즈음부터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지나고 보니 축복이었다. 스무 해 넘도록 그 노래를 들어온 이들이라야 안다. 이 노래는 마흔 즈음에 더 어울린다는 것을. 게서 살고 더 살아 마침내 쉰이 넘었을 땐, 역시 또 쉰 즈음이 더 맞춤하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 바람에 후배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아직 이 노래의 참맛을 모른다며 강변하곤 했지만, 사실 그건 꼰대 짓에 지나지 않음을 알면서도 부러 해 보는 수작일 따름이었다. 항상 가장 마지막 나이를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므로 나이의 체험은 늘 과장되는 경향이 있게 마련인 터, 서른은 서른답게 마흔은 마흔답게 이 노래를 통해 삶을 되돌아보면 그뿐인 게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김광석 ‘서른 즈음에’

잠시 머무는가 싶더니 허공 속에 흩어져 소멸해 버리고 마는 것. 가뭇없이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것. 그래서 담배 연기는 예부터 허무에 즐겨 빗대어지곤 했다. 하지만 이 노래의 시작은 다르다. 또 하루 ‘사라져 간다’가 아닌 것. ‘멀어져 가는’ 것이다. 떠나가는 것이다. 허무보다 아쉬움과 애틋함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십 대를 거쳐 이십 대를 보내고 문득 삼십을 눈앞에 두게 됐을 때 느끼는 아찔함도 그런 것. 서른은 청춘과의 아쉬운 작별이다.

그렇게 머뭇거리는 잠깐 사이에 서른을 넘긴다. 향내만 남기고 사라져 버리는 담배 연기처럼, 사랑의 기억은 여전하기만 한데 임과의 이별을 인정해야 할 때가 느닷없이 다가온 것. 서른 즈음에 느끼는 어정쩡함과 먹먹함도 그런 것. 준비 안 된 작별 탓이다. 머물러 있을 줄만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 몰랐다 해도 어차피 달라질 건 별로 없다. 청춘이란 감정의 과잉과 낭비가 아니던가. 사랑하기에도 바쁘고 모자란 시간에 이별을 어찌 준비하겠는가. 하지만 한번 떠난 기차는 돌이킬 수 없다. 플랫폼을 떠나가는 열차처럼 한번 멀어진 청춘은 가속이라도 붙은 듯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 그렇게 떠나가는 청춘을 우두커니 바라만 봐야 하는 서러운 서른.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더라는 거다. 한번 덴 가슴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별이란 매번 달라서 마흔은 마gms대로 눈물이 나고 쉰은 쉰대로 애처롭더란 거다. 그러기에 저 노래가 인생의 고개를 넘길 때마다 유효하고 적실하게 다가들더라는 거다. 다만 나이는 거저먹는 게 아닌 덕분에, 이별의 아픔에 무뎌지거나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보내야 할 걸 보낼 줄 알게 된 것뿐. 하여, 이제는 진짜 이별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타까운 건 서른 즈음에 생을 접었기에 김광석, 그는 정작 이를 알지 못했으리라는 것, 그리하여 그가 마흔 즈음 쉰 즈음에 이 노래를 부르는 걸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래서일까, 이 노래는 여러 가수의 목소리로 지금도 불리고 다시 불리고 또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 곡의 원조는 진작부터 따로 있었다. 다행히도 그 주인공은 마흔 넘어, 쉰 넘어서도 여전히 조용히 그리고 꿋꿋이 음악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는 하다못해 선후배들이 ‘노후 대책’과 ‘1집 만들기’ 프로젝트까지 추진해 주고 있는, ‘이소라의 프러포즈’, ‘윤도현의 러브레터’, ‘유희열의 스케치북’ 등의 음악감독으로 알려진 강승원이 바로 그다.


‘강승원 1집 만들기 프로젝트...ing’. 강승원의 음악친구이자 술친구들. ‘강승원 1집 만들기 프로젝트’ 뮤직비디오 촬영 중의 모습이다.

전설은 이렇게 전한다.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마지막 방송에서 강승원이 만들어 부른 이 노래를 듣고 김광석이 그 곡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단다. 그러잖아도 예전부터 곡 하나 달라고 하던 참이라 선뜻 주었다는 설도 있고, 몇 번의 구애 끝에 김광석이 돈다발을 들고 와서 곡을 달라고 하자 야단을 치며 그냥 가져가라 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 어느 쪽이든 노래에도 운명과 인연이 따로 있다는 말이 맞긴 한 모양이다. 김광석이라는 존재를 빼놓고 이 노래의 운명을 말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귀에 익어서 그렇지, 김광석 특유의 떨림이 주는 호소력도 좋지만, 강승원의 묵직함 뒤에 느껴지는 설움, 그리하여 센티멘털로 떨어지지 않는 그 절묘함이야말로 이 노랫말의 분위기에 딱 어울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강승원의 삼십 대 시절 앨범을 구하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처지인지라, 어쩌면 이러한 나의 선호는 단지 그의 나이 든 얼굴과 목소리에 기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서른 즈음에 머물러 있는 김광석과 달리 강승원이 부르는 ‘서른 즈음에’에는 ‘마흔 즈음에’ 또는 ‘쉰 즈음에’마저 들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는 그래서 더욱 김광석의 지금 빈자리가 아쉽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높이 사는 것은 그의 시적인 노랫말이다. 경이로울 지경이다. 특히 이 대목.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떠나간 사랑에 대해 한탄하는 듯하지만, 청춘의 세월이야말로 내가 잘못해 떠나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 억울함으로 어딘가 볼멘 목소리가 들릴 법도 한데, 잠시 흥분하는가 싶더니 이내 그지없이 담담해진다. 그래서 더 애절하다. 가는 세월, 가는 청춘과 더불어 조금씩 잊혀가는 것이 인생임을 받아들이기나 하려는 듯, 화자는 깨달음처럼 정리를 내린다. 산다는 건 매일 이별하는 거라고. 매일 하루하루와 이별하는 거라고. 이제 진짜 서른을 맞이한다.

그녀의 삼십 세


스물에서 서른으로의 고개는 결정적이다. 그런 복잡 미묘한 심리를 대변하듯 수많은 책이 ‘서른’의 옷을 입고 사람들을 만난다.

매일 이별하며 사는 일이 처음일 리 없다. 매일같이 벌어졌기에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다 문득 각성하게 되는 것은 단절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하루지만 1월 1일이 남다르듯 말이다. 스물에서 서른으로의 고개는 결정적이다. 그래서 서른이 코앞에 다가온 걸 인식하게 되면 가슴은 덜컥 내려앉고 몸은 털썩 주저앉는 느낌이 든다. 나이의 단층. 하면서도, 청춘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것 같은 찜찜함. 잘 알려진 대로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 세>는 이렇게 시작한다.

30세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더 이상 젊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자신은 일신상에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게 어색해진다.1)

젊다고 내세우기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젊지 않은 것도 아닌 그때, 그 단층의 낭떠러지 앞에서 우리는 예민해진다. 사춘기 단층의 애벌레 시절과는 사뭇 다르다. 이번에는 스스로 뒤돌아보고 내다보려 애쓴다. 주위를 민감하게 더듬어 본 촉각은 불가항력의 사태임을 보고해 온다. 그리하여 여전히 한 치 앞도 안 보이는데, 촉각 하나만 곤두세우고 어두워 뵈는 진짜 어른 세계의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 이제 내성의 갑옷만 키우면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인간은 사슴벌레가 아니다. 인생은 오래 지속된다.

그런 단층이 그 기나긴 인생에서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측면에서 보면 서른 살을 놓고 말이 많은 건 과장일지 모른다. 그러기에 서른에 대한 어떤 논의도 상투적일 수밖에 없다. 김광석에 이어 이제 최승자를 등장시키고자 하는데 이 역시 상투적이라는 지적을 면하기는 글렀다. 그것은 정이현의 신문 연재소설 2회분에서 이미 간파된 바이기도 하다.

일찍이 김광석은 노래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그렇게 말한 시인은 최승자다. 서른 살에 대한 으리으리한 경고는 너무 흔하다. 스물아홉 가을, 나는 갓난아이에게 홍역 예방접종을 맞히는 엄마의 심정으로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와라! 서른 살! 맞서 싸워 주마. 절대 지지는 않을 테다. 그런 식의, 유치하지만 제법 비장한 각오도 했었다.2)

하지만 서른이 과연 별거 아닐까. 그래서 다시 최승자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로 시작하는 최승자의 시 ‘삼십 세’. 이 선언은 청춘과 낭만과 결탁한 모든 서른의 고민을 엄살로 만들고 만다. 그녀의 눈엔 서른은 사느냐 죽느냐 사이의 어정쩡한 타협인 것이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이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 깔았네.

— 최승자, ‘삼십 세’3)

그녀에 따르면 서른은 청춘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흰 손수건 떨어뜨리며 항복하는 것이다. 행복과 기쁨을 위해 꿈을 버리고 골고다에 뼈를 묻고 눈을 감는 것이다. 죽는 것이다. 어차피 삼십 세는 새로 꿀 꿈도 없는 존재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진작 죽었어야 했는데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어 머뭇거리다가 그만 서른을 맞아 버렸다. 여하튼 살긴 살아야 하는 법, 살 수밖에 없는 법, 그리하여 살지만 죽는 것. 삼십 세가 된다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이렇게 그녀는 비아냥거리고 자조한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속인(俗人)이 되어가는 거라고 그녀는 의심하는 것 같다. 심지어 원숙해지는 것도 썩어버리는 경계에 다가서는 일 일지 모른다며 그녀는 회의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잘 무르익은 참외는 썩을 일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엘튼 죤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X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면 서XX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들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 최승자, ‘올여름의 인생공부’에서4)

시대가 변하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예술가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이 시 속에 등장하는 가수들을 보자. 엘튼 존은 한물갔고, 돈 매클레인은 타락했거나 변질됐다. 짐작건대 송창식은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면 짐작건대 서유석처럼 될지도 모른다. 원숙하면 곧 썩기 일쑤다. 그러니 썩지 않으려면 원숙함의 반대 길로 가야 한다. 나이 먹었다고 달관하고 도통한 척하지 말고, 아이가 되어야 한다. 서른이 아니라 마흔, 쉰이 넘어도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적어도 시인은 그래야 한다고, 그것이 인생 공부의 교훈이라고 그녀는 설파하는 것이다.

마흔 즈음에

그러나 현실은 반대다. 현실의 변화를 승인할 줄 알아야 성숙이라 일컫는다. 지난날을 감사하며 돌아볼 줄 알아야 어른이라 한다. 허나, 서른이라고 어른은 아니다. 서른이 됐다고 서둘러 노스탤지어를 말하지 말라. 잦은 회고와 향수에 젖는 것은 원숙이 아니라 늙음의 표상이다. 이제 곧 서른이 지나 마흔이 오고 쉰이 올 것이다. 시간은 오래 지속되고 인생은 기나니 회고는 그때 가서 하면 되는 것이다.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 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 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 최승자, ‘마흔’5)

마흔이 되면 어떻게 될까. 최승자 그녀에게도 마흔이 찾아왔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도 낭떠러지 단층인 것만 같았던 삼십 대를 회고한다. 가파르고 강퍅하기만 했던 삼십 대. 그에 비하면 사십 대는 드넓고 평탄한 평야 같다. 그래서일까, 삼십 세에 보였던 삶과 죽음 사이의 예각도 어느 사이엔가 다소 무뎌지고, 젊은 날의 암울함도 꽤 걷어진 듯한 느낌.

그러나 산다는 건 언제나 녹록지 않은 것, 너른 평야를 걷는 것 같다가도 곳곳에 함정과 복병이 도사리고 있는 것, 한없이 넓게 펼쳐진 것 같아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유리 벽이 에워싸고 있어서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머리 방아를 찧고 마는 것, 그것이 사십 대다. 젊은 시절의 험로를 헤쳐 나온 자신을 과신하며 사십 대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라 여기는 순간, 곳곳에 투명한 유리 벽이 가로막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 재수 없으면 한 방에 날아가는 것, 그것이 또한 사십 대다.

그러니 속지 말아야 한다. 저 거짓 궁륭 같은 평야, 저 투명하여 보이지 않는 유리 벽에 말이다. 자칫하면 평야의 구렁 속으로 추락하기 일쑤다. 유리 벽과 유리 천장을 뚫기 위해 다시 피를 흘려야 할 일도 생길 것이다. 노력해도 안 될 수 있다. 운명이 허락하지 않으면 뜻대로 사는 인생은 거기까지다. 그래서 타고난 팔자니 운명이니 운수니 하는 말에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 또한 사십 대다. 개인의 건강이든, 가정의 화목이든, 직장에서의 성공이든, 저 평야를 믿고 거기에 안주하는 순간, 사십 대는 위험해진다. 그러니 스스로에게도 속지 말아야 한다. 믿어온 도끼라 해서 영원히 믿음직하지는 않다. 모든 게 변해 가는데 변하지 않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사십 대의 처세법이요, 자기계발서류의 성공학에서 흔히 일컫는 레퍼토리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시인 최승자는 2연에서 이를 아주 경쾌하게 위반한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웬만한 거 다 알 법한 이 마흔에, 그것도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것이다. 부주의나 배반으로 인해 발등을 찍히는 것이 아니라, 발등을 찍히는 줄 알면서, 매일 그 짓을 거듭하면서도, 그래도 그 단 한 가지 믿는 것을 마다치 않는다는 게다. 그래서 시인이다.

사실, 성공한 사람도, 문제가 없는 사람도, 다 문제가 있는 게 사십 대다. 어느 날 돌아보면 휑뎅그렁한 껍데기뿐이다. 드넓은 평야도, 높다란 유리성도 다 헛것 같은 순간이 온다. 그때 우리는 다시 또 내 인생과 세월과 꿈과 사랑과 작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또 떠나가고 또 하루 멀어져 가고 있음을 말이다.

‘강승원 1집 만들기 프로젝트’에 들어 있는 ‘나는 지금...(40 something)’을 들어 보라. ‘마흔 즈음에’라 부름 직한 이 노래는 사십 대의 이적이 부른 버전과 오십 대의 강승원이 부른 버전 두 가지가 있다. ‘서른 즈음에’의 연작이라 생각한다면 이적의 목소리를, ‘서른 즈음에’가 마흔 즈음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면 쉰을 한참 넘은 강승원의 목소리를 택하는 것도 괜찮으리라.

떠나보내는 데 익숙해졌어/ 떠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나는 지금/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 너머로/ 당신은 내게 멀어지고 있고/ 사랑이라는 허전함 속에/ 기쁨보다 슬픔이 많아/ 끝도 없는 사랑을 믿었는데/ 가슴이 아파/ 떠나가는 너를 볼 수가 없어/ 멀어지는 너를 잡을 수 없어/ 떠나가지 마라/ 나의 청춘이 널 따라 멀어진다/ 나의 사랑이 널 따라 사라진다/ 떠나간다 멀어진다 사라진다

강승원 ‘나는 지금’

곡은 더 원숙해졌지만, 노랫말은 아무리 봐도 그의 서른과 마흔이 너무 가깝다. 마흔이 되었어도 여전히 떠나고 멀어져 간다. 여전히 떠나가지 않았으면 싶고, 멀어지지 않기를,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서른 즈음에 비하면 익숙해진 것뿐, 하지만 아무리 익숙해져도 허전하고 슬프고 아프다. 유리창에 갇힌 채 유리창 너머로 떠나가는 사랑과 꿈과 세월과 청춘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것이 마흔이라고 그는 노래한다. 그래서 ‘서른 즈음에’는 마흔에 어울리고 ‘나는 지금’도 마흔에 어울린다고 나는 우겨대곤 한다. 아마도 강승원이 서른 즈음에 지나치게 조숙했거나 마흔 즈음 들어서도 여전히 젊게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최승자 식으로 말해, 그는 엘튼 존과 돈 매클레인이 아닌 셈이니까.

실로 마흔이 된다는 것은 서른이 될 때보다 충격적이다. 마흔이 되어 보면 서른 살의 설움은 애교처럼 느껴진다. 청춘 운운하며 아쉬워하는 것도 서른 즈음에는 과장에 가깝다. 하지만 마흔이 되면, 마음은 청춘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청춘의 회복이 불가능함을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 이 발달 과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위험해지기에 십상이다. 그래서 마흔의 마지막 낭만은 가슴 아프다. 노랫말처럼 돌아갈 수 없고, 보내야 하고, 떠나가는 세월을 멍하니, 속수무책으로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한다.

하지만 마흔은 세월은 떠나가는데 옛날은 자꾸 되돌아온다. 노스탤지어를 말해도 될, 자작나무에 기댈 날이 가까워진 탓이리라.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이문재, ‘소금창고’6)

시인의 말을 빌리면, 그가 나고 자란 염전은 일제 식민 통치 때문에 탄생한 장소이자, 군사 정권의 근대화 프로젝트에 의해 수도권 쓰레기 매립지가 되어 죽음을 맞이한 장소다. 현대사의 진행은 당연히 개인의 역사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그는 생태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고향을 고스란히 잃고 말았다. 고향은 그렇게 떠나가고 멀어지고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가보지도 못한 아버지의 고향까지 기억 속에서 복원하고자 한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가 가는 곳, 그곳이 바로 피난 온 아버지의 북녘 고향 언저리가 아니겠는가.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주 온다. 사진은 추억을 간직한 능내역의 모습.

그런 생각을 하는 때가 마흔인 것이 우연은 아니다. 마흔에 회고하고 호출해 내는 지나간 것들은 아름답다.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다 보면, 역광 속의 갈대꽃이 눈부시고 오후의 햇빛은 수은처럼 빛난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이토록 아름다움이 눈물 나고,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의 부재로 또 눈물이 난다. 가장 좋은 날, 부모님은 안 계시는 법. 사랑을 알 만할 때 사랑은 떠나가는 법. 옛날이 그리운데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법. 그걸 간절히 알게 될 때가 마흔 살인 게다. 그러기에 옛날을 아무리 보내려 해도,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다.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세월이 갔던 것처럼, 내가 오라 아니 해도 자꾸 오는 것이 옛날 아니더냐. 그것이 서른과 마흔의 결정적 차이라 나는 믿는다.

주석

1) 잉게보르크 바흐만 지음, 차경아 옮김, <삼십 세>, 문예출판사, 1995

2) 정이현 지음, <달콤한 나의 도시>, 문학과지성사, 2006

3) 최승자 지음,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4) 최승자 지음,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5) 최승자 지음, <내 무덤 푸르고>, 문학과지성사, 1993

6) 이문재 지음, <제국호텔>, 문학동네, 2004

정재찬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메마른 가슴에 시심을 되돌려준 시 에세이스트. 다양한 장르의 문화 콘텐츠를 넘나드는 특별한 시 읽기로 일상에서 시를 ‘시답게 향유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한국문학교육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시를 잊은 그대에게》, 《현대시의 이념과 논리》, 《문학교육의 사회학을 위하여》, 《문학교육의 현상과 인식》 등이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기획물 전체>인문과 과학의 만남>시, 몽상과 묵상 2016.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