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chi
2017. 11. 10. 12:47

우리는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다
적어도 사람에 관해서는 더 그렇다.
한 사람을 두고 상상만으로
그 사람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아무리 예상을 해봐도
그 사람의 첫 장을 넘기지 않는다면
비밀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말 한마디가 오래 남을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의 귀에는 아무 말도 아니게 들릴 수 있을 텐데
뱅그르 뱅그르 내 마음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말.
한마디 말일 뿐인데 진동이 센 말.
그 말이 나를 뚫고 지나가 내 뒤편의 나무에 가서 꽃힐 것 같은 말이.
그날 밤은 나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잠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말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말,
모두 다 빗물에 씻겨도 씻겨 떠내려가지 않을 당신,
그 무렵 그 말이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를 당신에게 말하지 못했다.

당신이 좋다, 라는 말은 당신의 색깔이 좋다는 말이며,
당신의 색깔로 옮아가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당신의 색깔이 맘에 들지 않는다,
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했을 경우,
당신과 나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지켜야 하는 사이라는 사실과
내 전부를 보이지 않겠다는 결정을 동시에 통보하는 것이다.

색깔이 먼저인 적은 없다.
누군가가 싫어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그를 무조건 싫어할 수 없듯이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어떤 색으로 비치느냐에 따라
내가 아무리 싫어하는 색깔의 옷을 입었더라도
그 기준은 희생될 수 있으며 보정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데는 방향이 문제인 적은 있어도
색깔이 문제일 수는 없다.

열정을 다해서 끝까지 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연습을 하면서,
전속력을 다해 하고 싶은 것 가까이 갔다가
아무 결과를 껴안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연습을 하면서
우리도 살고 있지 않은가.
오늘 하루도, 내일 하루도 아니 어쩌면 우린 영원히
그 연습을 하면서 살아야 할 지 모른다.

그래도 당신에게 하나만 묻겠다.
이 벌판에서 당신은 도대체 얼마나 외로웠던가.
마당에 풀 번지는 외로움이었을까.
탁해진 눈가를 닦을 때에도 컴컴하게 쳐들어오는 외로움이었을까.
그 외로움에는 그래도 단맛이 섞였을까.
그래서 당신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던가.
"외롭지 않으면 또 무엇으로 살아요?"
당신은 그 외로움의 힘으로
가장 멀리 가겠다는 것인가.
훨훨, 당신이 가고자 했던 곳들을
당신은 지독히 밟으며 다닐런가.
어쩌면 우리는 그곳에서 외로움의 힘으로 마주쳐
그렇게 술 한잔 나눌런가.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