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ain`t over it`s over

그룹명2/길에게 길을 묻다 52

가슴에 묻은 김칫국물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칫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칫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 살다 보면 김칫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칫국물 한두 방울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다 손택수 시인의 늘 멋지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지만 세상에 부족하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요. 나의 약점도 받아들이고 인정해주세요. 자신의 빈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이 더 따뜻하고 좋아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Cantica - Diego Modena & Jean Phillipe Audin

생각이 달라졌다

웃음과 울음이 같은 음이란 걸 어둠과 빛이 다른 색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 내 음색이 달라졌다 빛이란 이따금 어둠을 지불해야 쐴 수 있다는 생각 웃음의 절정이 울음이란 걸 어둠의 맨 끝이 빛이란 걸 알고 난 뒤 내 독창이 달라졌다 웃음이란 이따금 울음을 지불해야 터질 수 있다는 생각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별처럼 나는 골똘해졌네 어둠이 얼마나 첩첩인지 빛이 얼마나 겹겹인지 웃음이 얼마나 겹겹인지 울음이 얼마나 첩첩인지 모든 그림자인지 나는 그림자를 좋아한 탓에 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졌다 천양희 시인의 종일 그늘졌던 서쪽 벽도 해가 질 때쯤에는 환한 빛이 비칩니다. 어두운 길목에는 대로변보다 더 많은 숫자의 가로등이 켜지죠. 세상의 어둠이 어둠으로 끝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아픈 사람들 곁에는 그들..

내가 걷는 백두대간

살아갈수록 버릴 것이 많아진다 예전에 잘 간직했던 것들을 버리게 된다 하나씩 둘씩 또는 한꺼번에 버려가는 일이 개운하다 내 마음의 쓰레기도 그때 그때 산에 들어가면 모두 사라진다 버리고 사라지는 것들이 있던 자리에 살며시 들어와 앉은 이 기쁨! 이성부 시인의 집안에 쓰지 않는 물건 정리하듯이 우리 마음에 앙금처럼 쌓인 분노, 상처도 허허 웃으며 비워버리기로 해요. 버리고 나면 후련하게 마음 안으로 행복이란 바람이 불어올 겁니다. The Last Dreamland - Elizabeth Lamott

어떤 하루

사용 설명서도 잘 읽지 않고 나는 나를 너무 많이 사용했다 삐거덕거리는 몸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는 듯, 오늘 하루 내 몸의 스위치를 다 내리고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본다 냇물 소리에 귀기울여본다 뛰는 개구리를 바라본다 제대로 보인다 사용 설명서에 없는 하루치 삶이 나를 더 밝혔다. 박두순 시인의 젊은 시절에는 젊음 하나만 믿고 몸을 혹사할 때가 많았죠.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 삐거덕거리는 몸을 갖고서야 내 몸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고맙고 미안했다며, 이제라도 쉬엄쉬엄 갈 테니 끝까지 잘 부탁한다고 말이죠. Dreams - Cranberries

손은 손을 찾는다

손이 하는 일은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에게 지고 내가 나인 것이 시끄러워 견딜 수 없을 때 내가 네가 아닌 것이 견딜 수 없이 시끄러울 때 그리하여 탈진해서 온종일 누워있을 때 보라 여기가 삶의 끝인 것 같을 때 내가 나를 떠날 것 같을 때 손을 보라 왼손은 늘 오른손을 찾고 두 손은 다른 손을 찾고 있었다 손은 늘 따로 혼자 있었다 빈손이 가장 무거웠다 겨우 몸을 일으켜 생수 한 모금 마시며 알았다 모든 진정한 고마움에는 독약 같은 미량의 미안함이 묻어 있다 고맙다는 말은 따로 혼자 있지 못한다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엊저녁 너는 고마움이었고 오늘 아침 나는 미안함이다 손이 하는 일은 결국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오른손이 왼손을 찾아 가슴 앞에서 가지런해지는 까닭은 빈손이 그토록 무..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 기도

그동안 내가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나무가 되기를 더 이상 봄이 오지 않아도 의자마다 싱싱한 뿌리가 돋아 땅속 깊이깊이 실뿌리가 내리기를 실뿌리가 매달린 눈물들은 두 작은 미소가 되어 복사꽃처럼 환하게 땅속을 밝히기를 그동안 내가 살아오는 동안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플라타너스 잎새처럼 고요한 바람에 흔들리기를 더 이상 새들이 날아오지 않아도 높게 높게 가지를 뻗어 별들이 쉬어가는 숲이 되기를 쉬어가는 별마다 새가 되기를 나는 왜 당신의 가난한 의자가 되어주지 못하고 당신의 의자에만 앉으려고 허둥지둥 달려왔는지 나는 당신의 의자 한번 고쳐주지 못하고 부서진 의자를 다시 부수고 말았는지 산다는 것은 결국 낡은 의자 하나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 작고 낡은 의자에 한번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었을 뿐 정호..

오래된 못을 빼내려다 못대가리가 떨어졌다 남은 못 몸뚱아리 붉게 녹슬어 있다 못을 박은 벽지 가장자리가 벌겋게 물들어 있다 지나버린 시간들이 있다 탱탱하게 녹이 슨 대못처럼 어쩔 수 없이 길들어진 내 가슴 가운데를 물들여놓은 시간들이 있다 더는 박을 수도 뽑을 수도 없는 더는 아무것도 아닌 무엇도 되지 못하는 그렇게 주저앉은 시간의 궁지(窮地) 홍경나 시인의 나에겐 아직도 의미가 있는 일, 사람, 관계라고 믿었지만 알고 보니 과거 어느 지점에서 이미 끝나버린 것들이 있죠. 한때 가슴을 물들였으나 지금은 무엇도 아닌 것들